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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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혈 제3부 22.
2012년 07월 09일 22시 27분  조회:3768  추천:0  작성자: 김송죽
 

22.

 

   北路軍政署는 군영(軍營)을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西大岥溝)로 잡았는데 이곳은 유벽(幽僻)한 밀림지대였다.

   北路軍政署의 서일총재는 기여히 독립전쟁을 하려하였기에 일정한 근거지를 설치하고 먼저 師團兵力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내세우고는 일체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1개의 師團兵力을 유지하려면 독립군은 간부만도 200명정도는 양성해야겠기에 그는 우선 사관련성소(士官鍊成所)를 따로 세우고는 먼저 제1기생부터 급히 훈련시키였다. 정식개학을 한 날자는 1920년 3월 20일이다.

             

   학원이 400명에 이르는 이 련성소의 예비훈련반은 군본부(軍本部)와는 거리가 약 300m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위치했는데 새로 지은 6채의 교사였다. 그리고 사관련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리쯤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여기 서대파는 동포가 살고있는 덕원리 촌락에서는 약 80~90리정도 떨어진 먼 거리였다. 그러했음에도 이 지역으로 매일 수십명이 군사보급과 련락관계로 왕래하였다.

   특히 식량과 부식(副食)의 운반때문이였다. 사관생의 주식은 좁쌀밥이고 부식은 산채와 물고기였는데 때로는 돼지고기와 소고기같은 육류도 있었다.

 

   <<사관학도의 향궤(餉饋)를 위하여 소 두 마리를 사서 보냈다.>>

   1920년 7월 15일자 北路軍政署司令部 日誌에 적혀진 글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압록강, 두만강과 거리가 4~5백리되며 본영은 전략전술상 오지(奧地)로서 일제가 침입할 수 없었거니와 적밀정의 출입도 다른지역보다 곤난했다. 혹 밀정이 침투했어도 그를 처리함에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등의 독립운동단체와 다른 독립군은 일제의 밀정을 체포하게 되면 여하불문하고 사형에 처했거니와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면서 한국내로의 친입작전을 전개했다. 그러했기에 일제는 주로 이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은것이다.

   북로군정서는 그와는 달리 일제의 공격대상으로 되지 않음으로하여 전략상 후일의 독립전쟁을 위해 축력(畜力)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의 소장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인 김좌진이였다. 그 외 학도단장에 박영희, 교관에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이였고 불상사(不祥事)사건 때문에 新興武官學校에서 건너간 김춘식, 오상세, 이녕희, 백종열,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도 한때 그 사관련성소의 교관으로 되였다.

 

   하다면 신흥무관학교 불상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新興武官學校는 1920년초에 본교가 통화현 합니하(哈呢河)에 있고 분교는 통화현 칠도구(七道構) 쾌대모자(快大帽子)와 고산자하동(孤山子河東) 등 세곳에 나뉘어 있었다.

   고산자분교에서 윤기섭(尹琦燮)교장을 추방함으로서 학생들간에 두파가 생김과 아울러 서로군정서의 독립군과 재만동포들사이에 이르기까지 두파가 생겨 편싸움을 했거니와 그러는 중에 인명피해까지 생겨 결국은 윤기섭(尹琦燮)이 상해로 도망가고 그를 이어서 교장으로 이장녕(李章寧)이 취임하였으나 그도 사태를 잘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초청에 의해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력점을 두어야 하는 시점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불상사로 인하여 그같이 엄중한 사태를 초래한 것은 독립군의 전력(戰力)에 약화를 가져다 준 대단한 불행이였다. 

   돌이켜보면 西路軍政署및 新興武官學校 자체의 불상사도 문제거니와 외적인 여건도 순탄치 않았다. 일제령사관측에서는 재만한인사회에 밀정을 투입시켜 독립운동진영을 분렬와해시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군세력과 독립군이 재만동포들을 상대로 한 독립운동자금 모금역시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었기에 냉대와 혐오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군지간에도 감정이 맞지 않아 모순이 쌓였으니 단합하지 못한 것이다.

   남만주와 북만주의 독립단체를 모두 합치면 50여개도 넘었는데 이 중에서 북로군정서는 경비대원만도 약 30명 정도 있어서 이들이 구역을 지키였지만 다른 독립군은 그렇지 않았다. 지어는 병력이 다해봤자 30명~60명정도면서도 자기들의 구역을 확보하느라하였기에 독립군끼리 구역 차지 때문에 서로의 알륵과 투쟁이 계속되면서 문제가 항상 파생되였던 것이다.

   

   이러함에도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들의 끈질긴 불면불휴(不眠不休)의 노력에 의해 만주에서의 독립군력량은 그래도 총체적으로는 발전하는 추세를 이루었으니 천만 다행이였다.

   북로군정서는 자기 관할범위내에서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했다. 평균 30호를 1구(區)로 하고 18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청장년들을 입대시켰는데 매개의 구(區)에서 15~20명을 징병하였으며 년령에 구애없이 능력자는 간부로 채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해주는 물로 지어는 국내에서 까지 지원자가 나선것인데 그들은 다가 독립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의 군대라고 자부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용을 떨치지 않을 수 있으랴?!

 

     나아가세 조선나라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기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락엽같이 쓰러지리라

     

     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캐 말발굽에 밟히는 모양

     듣느냐 이천만의 단조의 혈손

     원쑤의 칼아래서 우짖는 소리...

 

   만주의 넓은 산야에서는 “독립군가”의 우렁찬 노래소리 메아리쳤다.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1920년 2월 17일자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론하여 독립전쟁의 결행을 경축하면서 승리를 기원했다.

 

   <<2천의 독립군의 승첩은 동아의 대혁명의 개시를 <宣>하는 경종이라 하노라. 이미 불은 당기였도다. 폭풍우의 선구자 지평선을 스치고 가도다. <중용한 대한의 남아여, 혈전의 시 광복의 추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야 자유를 위하야 민족을 위하야 총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군무부포고) 독립전쟁의 제1보에 우리에게 돌아온 이 승리는 즉 독립전쟁의 전도를 하는 승리요 동아혁명이 성공을 祝하는 승리로다. 승리를 축하할자는 나오라. 승리를 향하야 돌진할자는 나오라.>>

 

   무장을 이미갖춘 독립군들에서는 훈련을 다그쳤다. 왕청현 서대파에 있는 북로군정서의 사관련성소와 명월구에 있는 대한국민회사관학교에서는 매일 5시간이상 창격훈련과 배낭에 6관의 흙모래를 넣어 메고 군총으로 완전무장하여 산야 어느곳에서나 구보 혹은 도보행진을 했다. 그것은 실로 고된 군사훈련이였다.

   이때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에서 사용한 병서(兵書)는 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인입한 것이였다.

   김좌진은 병서(兵書)에만 의거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한곳을 공격하고는 후퇴하며 지구전으로써 적에게 손실을 주어냐 한다.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의 무기를 빼앗고 한곳을 습격하여 한곳의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우리의 전쟁의 비결은 지구전으로 적의 사기를 저락시키며 경제적으로 부담을 과중하게하는데 있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유격전의 성격을 띤 장기적인 지구전은 강적인 일제와의 싸움에 유용한 것이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간부진영은 다소 변화되였다.

 

   총          재:  서      일

   총    사    령:  김  좌  진

   모  연  국  장:  계      화

   재무및검사국장:  김  덕  현

   군사교육 국 장:  김      일

   외  교  부  장:  김  병  덕

   의  군  단  장:  허      근

   의  용  단  장:  허  재  명

   군  정  위  원:  고      평, 김  덕  현, 손  범  철,

                    김      희, 김  근  우, 신  원  균.

   모 연 대 감 시:  정      신

   제  1  대  장 :  최      한

   제  2  대  장 :  현      갑

   제  3  대  장 :  김      한(김  상  원)

   제  4  대  장 :  김  홍  래

   제  5  대  장 :  현      우

   제  6  대  장 :  황      희

   제  7  대  장 :  리      위

   제  8  대  장 :  조  춘  순 

 

   사관련성소는 이범석(李範奭)이련성대장이였고 총사령인 김좌진(金佐鎭)은 학교장을 겸하였으며 김규식, 홍홍국, 최상운 등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약 1,100여명으로서 그중 잘 훈련된 정예군인이 600명이고 나머지 500명은 경호력이였다. 무기는 장총 800여정, 기관총 4정, 포 2문, 수류탄 2,000여개였다.   

 

   이에 만족할 서일(徐一) 아니였다.

   어느날 그는 훈련을 검열하고나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되겠소! 안되겠소!》

   여직 그토록 땀동이를 흘리면서 훈련을 했건만 안되겠다고 불만족이니 이는 불합격을 의미하는게 아닌가. 김좌진은 속이 개운치 않았다. 그의 이같은 속심을 알아본 서일은 얼굴에 밝은 웃음기를 올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이야 기능껏 훈련을 시켰지. 우리 병사들의 소질이야 이만큼하면 나무릴것이 없다고 보오. 훌륭하지! 내 말인즉은 무기가 안되겠다는 거요. 장군도 보다싶히 근 절반이 저렇게 낡아빠진거요. 저따위 부지깽이만도 못한걸 가지구야 어떻게 강한 적을 당해낸단말인가?... 바꿔야 하오. 신식무기로 바꿔야 하오, 바꿔야 해! 가급적으로 빨리!》

   김좌진은 들어보니 과연 옳은말인데 가급적으로 빨리라면 어떻게 빨리한단말인가? 원래 무기구입은 큰 골칫거리가 아니였다. 로씨아에 출병했던 2개군단의 체코병이 대전이 끝나 련합군의 주선하에 울라디보스톡항구에 모여서는 배길로 철거하면서 자기들이 소지했던 무기들을 팔아버리길래 기회가 좋아 그것들을 사들이기로 계획하고 지난날 이미 원호회(原戶會)의 김영선(金永善), 최우익(崔禹益)의 주선으로 니콜리스크방면으로부터 군총(軍銃) 3만정이나 구입하기로 계약이 되었던 것이다. 헌데 전에 마련되였던 거액의 현금은 로씨아정부가 인츨레이션 때문에 화페개혁을 하는 통에 그만 모두가 페지로 되고만 것이다.

   김영선(金永善)으로부터 무기를 인수받으라는 통첩이 왔다.

   그런데 당장 돈은 어떻게 장만하는가? 백성들에게서 군자금을 걷는단말인가? 서일도 김좌진도 고민을 하고있는데 하늘이 도와주는지 뜻밖에 행운이 생기였다.

   아주생면의 사나이가 북로군정서로 김좌진(金佐鎭)을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속초(束草)서 사는 어부 달손이요. 자네가 김좌진이가 옳은가?》

  《옳습니다. 내가 김좌진입니다. 무슨일에 나를 찾는지?》

   김좌진은 가마잡잡한 얼굴에 주름투성인 늙은이(기실은 나이50전이였다)의 래방이 괴이쩍어서 되잡아 물었다. 이름이 달손이라고 자아소개를 한 그 어부가 입을 들까블면서 계속하는 말인즉은 자기는 달포전에(거짓말이다) 운두높은 모자에 별을 단것을 보니 벼슬이 어마어마한 장관일시 분명하다면서 좌진이와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 황옥(黃鈺)이라는 그 사람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였다. 황옥(黃鈺)인즉은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의 경부(警部)였다. 그가 어쨌단말인가?

  《달포전에 그 사람이 내한테 한가지 부탁한게 있어서...》

   그가 어물거리다가 이어서 하는 말이였다.

  《그 뭐라더라, 금괴말이여, 나보구서 그놈의거 있다구 여게다 알려 찾아가게 하라길래 내가 젠장!... 그래서 여적지 들개같이 헤매친건데 젠장!... 나원 시끄러워서!... 이거 원 사람을 찾을 재간있어야지. 그래서 여기저기 만주일판 싸다니고 헤매다가 여기를...》

   동에 닿지 않은 소리같지만 그 뜻은 분명한지라 모두들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금괴라니?!... 도대체 웬 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지는가? 모두가 너무기뻐서 넋을 잃을 지경에 이르는 순간이였다.

   이제는 거의 2년철이 되어온다. “황금흑사심(黃金黑思心)”이라 자기를 달손이라 소개한 어부는 여지껏 횡재(橫財)를 했다고 여기면서도 자칫잘못했다가는 일가멸족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금괴 8상자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깝자르며 지내오다가 드디어 머리를 깨서 그것이 가야할 주인을 찾아야겠다고 나선거고 그의 말과 같이 들개같이 싸다니며 갖은 신고 끝에 드디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네놈의 대갈통을 묵사발되게 만들고말테다.!》

   김좌진은 이를 뿍 갈았다. 밸같으면 당장 그러고싶었지만 그가 어쩌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독립군에 구원의 손실을 내민 은인같기도해서 그만 하하하 웃고말았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일도 웃고 계화도 웃고 조성환이도 웃고... 그 자리에 있은 사람 다가 한바탕 크게 웃고말았다....

   이 일은 본래 윤치성(尹致晟)과 밀접히 관계되는 것이였다.

   윤치성(尹致晟)은 1875년 3월생으로서 경성(京城)태생이다. 일찍이 일본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02년에 구한국궁성(舊韓國宮城)의 시종무관으로 임명되여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이갑(李甲), 류동설(柳東說), 노백린(盧伯麟),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김좌진(金佐鎭)과도 친하게 지내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늑체(勒締) 될 때 그는 이완용(李完用) 등 오적(五賊)에게 상(床)을 던지였다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여 고문을 당하였다.

   고종(高宗)은 마침내 각성하여 일제의 무리를 타도하려는데서 궁중에 보관했던 금괴(金塊)를 빼내여 그것으로 군자금에 충당할 작정으로 그때 심복으로 데리고있은 시종무관 윤치성(尹致晟)을 불러 그 임무를 맡기였던 것이다.

   윤치성(尹致晟)은 본래 일제의 요시찰인인지라 그 중임을 맞고는 일본헌병의 눈을 피하여 1917년에 금괴(金塊) 8상자를 처음 동녕궁(東寧宮)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때의 동녕궁(東寧宮)은 부마 김공진(駙馬 金孔鎭)의 거처였다. 김공진인즉 김좌진의 형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외로 빼돌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윤치성은 일본경찰의 요시찰인원인 자기가 직접 나설수 없는 정황에서 가장 심복이였던 당시 경기도경찰부에 있는 황옥경부(黃鈺警部)를 불러 그 중임을 맏기었고 황옥(黃鈺)은 자기의 직분을 리용하여 그후에 금괴(金塊)를 동해안 속초까지 운반하여 그곳에서 어선(漁船)에 실어 로씨야의 울라디보스톡까지 옮긴것이다. 목적은 그것을 북로군정서에 넘기여 그것이 독립군의 무장구입과 군수용에 씌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것이 2년철이 다 되는 오늘에야 비로서 제주인을 찾게 된 것이다.

돈이 급속히 수요되는 북로군정서로 놓고 보면 이건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인지라 모두들 미칠지경 기뻐했다.

 

   당장 그자리에서 무기구입대가 조직되였다.

   총재(總裁) 서일이 직접나섯다. 그를 따라 募捐局長 계화가 나섯고 임정의 요원이면서도 몸을 여전히 이곳에 두고있는 財務部長 조성환도 나섯다. 전에 무기구입을 다닌바있는 機械局長 량현(梁玄)과 현갑(玄甲)이 그들을 인도하여 軍營을 떠나갔으니 맨 마지막축이 1920년 7월 9일이였다. 

 

   멀쩡한 어부 달손이가 지금은 코꿰인 송아지로 되였다. 그날 자기의 고기배에 실어서 울라디보스톡근교에 있는 저의 매부집의 거의 쓰러져가는 헐망한 헛간구석에 처박은 그것이 귀중한 보물이라는것을 더 아는 사람이 없었길래 그야말로 여지껏 기적적으로 무사히 지내온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맘이 구정물같이 맑지를 않아서 물건이 이미 찾아갈 사람의 손에 넘어갔노라고 거짓말을 해서 황옥경부를 속이고 여지껏 멀쩡히 보낸건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아는지라 그는 전전긍긍했다.

 

   이때의 독립운동단체와 독립군의 무기구입경위는 다양했다. 동청철도연선으로 구입하여 운반하는 경로를 제외하고는 주로 연해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였는데 운반경로는 대략 3갈래였다.

   첫 번째 경로는 우쑤리연선방면으로부터 왕청현 오지지역으로 들어오는 길이였다. 철로의 니콜리스크를 경유하거나 또는 하수빠수카야 류정구역(柳亭口驛)방면으로부터 륙로국경역인 포구라니수야부근으로 나와서 국경을 넘어 둔전영통로(屯田營通路) 또는 삼차구(三岔口)를 경유하여 대오사구로(大烏蛇溝路)로 나와서 수분하원(綏芬河源)으로 거슬러올라가 왕청현오지 라자구(羅子溝)지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두 번째 경로는 추풍(秋風)방면으로부터 왕청현오지방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블라지보스톡 또는 니콜리스크트지방 및 추풍(秋風)방면으로부터 왕청현오지 방면으로 반입하는 길인데 동녕현의 국경 호포도하연선(胡布圖河沿線) 또는 삼차구(三岔口)로부터 국경을 넘어서는 대오사구로(大烏蛇溝路)로부터 물길을 따라 로흑산(老黑山)으로 나와 치알거띵즈(72介頂子), 라자구, 화소포를 경유하여 훈춘현 대항구 또는 왕청현 춘명향 대파구방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남부 연해주로부터 훈춘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훈춘현 국경방면으로부터 반입하는 길은 주로 홍무하상류(紅無河上流)지방의 삼림지대 또는 하마탕방면으로부터 교묘히 국경감시를 피해서 훈춘오지방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이상의 길들이 전에는 다가 아편을 비롯한 밀수상들이 다녀서 생긴것이였는데 지금은 독립군들이 무기를 비밀리에 사서 운반하는 통로로 변해버린 것이다.

   왕청 서대파군영에서 목적지에 이르는데 3일이 걸리는 로정이였다.

   이때의 연해주형세를 보면 일부지방에는 아직도 백계(白系)의 로씨야인이 있고 일본군이 출병한데다 토비마저 출몰하니 치안이 극도로 혼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일을 비롯한 계화, 조성환 등 그 몇사람이 먼저떠나가 일을 성사시켜놓는 족족 알리면 이쪽에서 경비대장(警備隊長) 리교성이 운반대를 호위하여 금과 바꾼 체코식의 신식무기들을 하나도 허실이 없이 나르기로 한 것이다.     

   북로군정서의 무기운반은 기쁜일이기도했거니와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간고한 고역이기도 했다.

   운반대의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더구나 농번기여서 일손이 매우 딸릴때였다. 동원된 농민들은 1주일이면 무기운반이 끝나리라여겼는데 시일이 썩 많이 걸렸다. 그러니 농사일이 문제였다. 무기구입이 생각과 같이 제꺽제꺽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동원된 무기운반대의 농민과 경비대가 한달동안이나 로씨야의 동포마을에서 가래나무껍질을 벗겨 신이나 삶으면서 무료히 기다리는 때도 있었다. 그 마을의 동포호수가 다해봤자 30호에 불과했는데 무기운반에 나선 사람은 230명이나되였다. 그러니 한집에 무기운반대원이 각각 7,8명씩 분산분배시켜서 수용하게 하였다.

   그랬으니 어찌되였겠는가?

   <<밥 한그릇으로 그집 온 가족과 무기운반에 동원된(한집에 약 7명)인원이 밥 한숫갈씩 먹고 지내려 하니 고통이 이루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6월에 새알만한 감자마저 캐먹었다.>> 

   훗날 나온 한 회고록의 글이다.

   로씨야의 동포마을에서 대기하는 동안 식량문제도 문제려니와 언제있을지 모를 일본군이나 토비(土匪)의 습격으로부터 무기운반에 동원된 농민들을 보호해야했기에 경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느날인가는 경비병이 곰이 나타난줄로 알고 총을 갈긴것이 제 동료의 총개머리를 맛혔다. 온 촌민이 총소리에 놀라 소란을 피웠고 한번은 또 낮모를 녀인이 나타나니 그녀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무기운반시까지 억류한적도있었다. 그같이 극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무기와 탄환을 인수하여 힘껏 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군병참을 싸움없이 통과한 적도 있고 비가 억수로 퍼부어 게곡에 물이 많이 흐르니 계속 정상(頂上)으로 쏘만국경선을 넘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일본병참과 5리가량 상거한 10여호되는 동포마을에 이르러서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잠든적도 있었다.

   이번에 운반된것이 제일많았는바 보총 1,300자루에 중기관총 7문, 권총 150자루, 탄약 20상자였다. 

   

   北路軍政署司令部日誌에는 다음과같이 기록되여있다.

   1920년 7월 9일, 12일, 22일, 26일, 28일, 30일, 31일.

           8월 4일, 9일, 10일, 11일, 24일.

           9월 7일.  

   3개월에 걸쳐 13회출발했으니 이는 北路軍政署 자체가 로씨야로부터 무기운반에 큰 비중을 두었음을 말한다.

   북로군정서는 전에 병력이 500명에 장총이 500정, 권총이 40정, 기관총 3문, 탄환 5만발, 군자금이 10만원이라했지만 오늘에 이르러는 인원으로부터 무장에 이르기까지 면모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한편 정의단을 북로군정서라 개칭하면서 각지에 경찰사무(警察事務)와 정보련락을 하는 경신분국(警信分局)과 기타기관을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제 기능들을 발휘하고 있었다.

   속담에 “까마귀날자 배떨어진다”고 무기운반이 방금 다 끝나자 어느날 왕쳥현경내에 “서총재의 옛날딱친구”가 또 나타났다는 警信分國局의 정보가 들어왔다. 그 딱친구라는 것이 다른사람이 아니라 최삼용이였다.

  《자식이, 히질기게 달라붙네! 이번에는 또 무슨 냄새를 맡을려고 나선거냐?》

   서일은 그의 출현에 놀라지 않으면서 대처할 방법을 연구했다.

   적은 북로군정서가 많은 무기를 구입했으니 장비정황을 구체적으로 알자고 할것이다. 두려울것 없었다. 그는 이제는 왜적에 고자질하는 것을 제 직분으로 삼고있을 직업간첩인 그를 목숨은 그냥 붙여주면서 되부려먹기로 작심했다.

   간첩운용에 5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1) 인간(因間)ㅡ 적과 한고향인 사람을 간첩으로 한다.

   (2) 내간(內間)ㅡ 적측의 관리를 간첩으로 쓴다.

   (3) 반간(反間)ㅡ 적의 간첩을 내가 되쓴다.

   (4) 사간(死間)ㅡ 일부러 가짜정보를 살포해 이켠의 간첩이 가짜정보를 적측에 보내여 적이 얼리우게 만드는데 일단 정체가 드러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5) 생간(生間)ㅡ 정찰한 다음 능히 살아돌아와 적정을 알리는 사람.

   서일은 3번째의 反間策을 쓰기로 작정했다.

  

   최삼용이 왕청 덕원리를 찾아왔는데 청진을 떠날때 찌까다비(일본신)를 100컬례나 등짐으로 지고 국경을 넘었는데 한주일사이에 벼락같이 다 팔려 이것밖에 없다면서 네가 신으라며 5컬례를 내놓는 것이였다.

   서일은 금석지교(金石之交)의 정분을 봐서도 너의 가정에 우환이 미치지 않게 한다면서 그가 알고싶어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日帝의 情報資料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했다.

 

情報資料: 

團名ㅡ 大韓軍政署(北路軍政署)

所在地ㅡ 汪靑縣 春明鄕 托盤嶺 西大坡(鮮名)

首腦者氏名.   職  名

   徐  一    總  裁

   金佐鎭    司令官

   玄天黙    副總裁

   羅仲紹    士官敎官

   李天乙      同

   尹昌鉉      同

   尹友鉉    經理局長

   金  赫    通信局長

   金載龍    軍議政

 

   兵數   及  支那人有無

   警衛兵  200名

   

   武器數  及  種類

   機關銃  3挺

   連發銃  300挺

   38式銃  11挺

   舊式先込銃  15挺

   南部式拳銃  8挺

   7連發拳銃  25挺

   ××式拳銃  10挺

   食糧充實有無ㅡ 充實

   活動時間ㅡ 未定

   服裝洋式ㅡ 完備

   

   駐屯情況

   ㅡ 朝鮮式草家屋 15間

   ㅡ 天幕 3個所

   ㅡ 其他民家借用 12間

   ㅡ (挺)天幕 3個所

    

   操鍊狀況

   ㅡ 舊韓國陸軍式操鍊

   士官學校 及 敎師

   氏名並二生徒

   ㅡ 士官學校二個所

   敎員ㅡ 羅仲紹

   舊韓國陸軍營長ㅡ 李天乙

   同  支那語擔任ㅡ 尹昌鉉

   無道尹公署通譯

   學生ㅡ 400名

   敎員ㅡ 3名

 

   최삼용은 서일이 발설한 이 정보를 믿었다. 헌데 그것은 근일에 무기를 몽땅 신식의 체코식으로 바꾸기 전의것이였거니와 어떤 탄환은 수자도 밝히지 않았다. 서일은 네가 신장사를 한다니 마침잘됐다, 학생들이 신을 신이 없어서 고생인데 통일적으로 해결하게끔 찌까다비를 500컬례만 가져오거라 사겠으니. 속한시일내에 제꺽 가져와야 한다면서 계약을 맺고는 먼저 그 절반값을 선불까지 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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